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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꼴찌의 짧은 생각] #39. 딸의 첫 생리

꼴P 2017. 2. 8. 2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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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때 교양방송 FD 시절이었다. PD선배가 단편 영화를 찍는다면서 주연 배우를 맡으라는 것이었다. 워낙 좋아하는 선배였으니 가라면 가고 오라면 오는, 선배의 말에 조건을 달지 않는 순종적인 후배였다. 


<울보 아빠>라는 제목에 조폭 건달역이었다. 관계가 소원한 딸이 첫 생리를 시작한 날 약국에서 순면 생리대를 사서 선물하는 내용이었다. 얼마전 선배의 블로그에 이 단편영화의 원본을 찾을 수 없다는 내용의 글을 봤다. 천만다행이다. 



아내가 카카오톡으로 문자를 보냈다. 딸이 생리를 시작했다는 내용이었다. 이제 만 12세가 되지도 않았는데, 참 빠르다는 생각이 우선 스쳤다. 그 다음은 여자라면 거쳐야 할 과정이지만 하나의 산을 넘은 딸이 대견스러웠다. 


논현동 지하 사무실에서 배우들이 모여 만든 창작단체의 인터뷰 촬영을 마치고 귀가하는 길에 동네 꽃집에 들렀다. 


"안개꽃에 장미 한 송이 가능할까요?"

"가격대는요?"


꽃집 아주머니의 표정은 썩 좋지는 않았다.

하지만, 나는 썩 좋은 표정으로 물었다.   


"어떻게 하는데요?"


아주머니는 나를 한 번 힐끗 쳐다보더니,


"그냥 만원에 맞추면 되요?"

"네..." 


장미 한 송이를 선물하겠다는 남자가 만원이라니... 시덥잖다는 느낌이었다.

망설이다가 이야기를 했다. 


"딸이 첫 생리를 해서 선물하려고요..." 


꽃집 주인아주머니의 살짝 굴곡진 미간이 이내 펴지더니,


"아... 그래요?"


옆에 있던 아르바이트 생인지 직원인지 모를 20대 후반의 여성의 입가에도 미소가 번졌다. 


  




만원짜리 꽃다발을 준비하는데 20여 분이 넘게 걸렸다. 


"우리 때는 아버지한테 들킬까봐 쉬쉬 했는데..." 


사실, 딸도 내게 아니라고... 심지어 똥 싼 거라고 이야기 했다. 


"딸도 엄마한테 며칠동안 아니라고 우겼다고 하더라고요...ㅎㅎ" 


꽃집 아주머니의 손길이 바쁘지 않았다. 이렇게 꽂았다가 다시 빼기도 하고, 안개꽃을 정렬하면서 장미 한 송이를 꽂는데 여러번 신경을 쓰는 듯 했다.


" 아빠가 이렇게 신경을 써주면 딸이 자신감을 얻어요..." 

" 고맙습니다. 신경을 많이 써주시네요..."

" 나중에 또 꽃사러 오세요..." 


아주머니는 축하의 말보다 글이 더 낫다며 작은 카드에 편지를 쓰라며 조언을 하기도 했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딸에게... 라는 문구로 시작해서 첫생리를 축하하고 사랑한다로 끝나는 짧은 편지글을 썼다. 




애슐리에서 저녁식사를 마치고 생리대를 구입했다. 선배의 단편영화에 출연했을 때 처럼 순면 생리대를 구입하려고 했는데, 아내의 말에 의하면 사이즈가 맞는 게 없단다. 생리대 선물은 아내의 몫으로 맡겼다. 


며칠 전까지 사춘기구나 싶었다.그래서 예민하게 굴고 큰 소리를 지르는구나 싶었는데, 그런 행동들이 이해가 됐다. 살짝 갈등이 있었는데, 봄눈 녹듯 사라졌다. 스스로 몸의 변화를 느낀 딸이 앞으로 어제보다는 성숙한 오늘을 사는 사람이 되기를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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